1. 도서관 AI, 기술 주도가 아닌 ‘사서 주도 설계’의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서관 역시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추천 알고리즘, 자동 분류 시스템, 챗봇, 음성인식 안내 등 AI 기반 서비스는 이제 도서관의 일상적인 운영 요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러한 기술들이 사서의 전문성과 철학 없이 구현될 때, 도서관의 공공성과 중립성, 포용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중심이 아닌, 사람(이용자) 중심의 설계가 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 ‘사서’가 있어야 한다. 사서는 단순한 이용자 응대자가 아니라, 도서관 이용자의 행태와 정보 요구, 정보 윤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전문가로서, AI 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예컨대 도서관 추천 시스템이 단순히 이용자의 클릭 데이터를 기반으로 콘텐츠를 추천한다면, 자칫 정보 편향이나 특정 장르의 과다 노출을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사서가 참여해 설계한 AI 시스템은 이용자의 연령, 정보 리터러시 수준, 읽기 취향의 다양성까지 고려해 균형 있는 정보 제공이 가능하다. 또한, 공공도서관의 핵심 가치인 정보의 평등한 접근권 보장을 고려하면, 사서의 윤리적 판단이 기술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사서 참여형 AI 설계’, 즉 AI 시스템 설계 단계부터 사서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기능과 알고리즘의 방향을 설정하는 모델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는 도서관의 자동화가 인간 노동의 대체가 아니라, 인간 지식 노동의 질적 확장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2. 사서 주도형 AI 설계의 실제 사례들
사서가 설계 단계에 직접 참여한 AI 시스템의 사례로는 먼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의 인공지능 분류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도서관은 학술자료의 자동 분류 시스템 개발 시, 사서들이 직접 주제어 기준을 제시하고, 인공지능 학습 데이터의 편향성 여부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기존 자동 분류에서 종종 발생하던 여성학, 인종 관련 주제의 누락이나 편향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이용자들이 다양한 관점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사서의 전문성과 사회적 감수성을 반영한 설계는 AI 시스템이 보다 포용적이고 공공성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돕는다.
또한 핀란드 헬싱키 시립도서관의 ‘AI 추천 시스템 설계 위원회’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위원회는 사서, 데이터 과학자, 이용자 대표가 함께 참여하여 도서 추천 알고리즘을 공동 설계하고 있다. 사서들은 특정 도서의 성격, 연령 적합성, 문학성, 사회적 민감성을 평가 기준에 반영하며, 이를 통해 기계 학습 모델의 학습 방향을 인도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도서관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일부 도서관이 이용자 검색 데이터를 활용한 추천 시스템을 구축하며, 사서가 큐레이션 기준을 설정하고 피드백을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설계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기술 도입이 사서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 설계자 역할로 확장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3. 인간 중심 AI 설계를 위한 사서의 기획 역량
이러한 AI 설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사서의 역량 또한 변화해야 한다. 이제 도서관 사서는 단순한 정보 관리자에서 나아가, 기술의 방향성과 윤리를 설계하는 전략적 기획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과학, 데이터 리터러시, 알고리즘 윤리, 사용자 경험(UX)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필요하다. 단적으로, 기계학습 모델의 편향을 파악하고, 이를 이용자 중심으로 조정할 수 있는 감각은 단기간의 기술 습득이 아니라, 도서관 철학과 정보 정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도서관계는 사서 교육과정에 AI 활용 기술뿐 아니라 기술 윤리와 인간 중심 설계 역량 강화를 위한 커리큘럼을 적극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기술 기획 과정에서 사서들이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구조도 중요하다. 기술 기업이나 외부 벤더가 만든 시스템을 단순히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 내부에서 사서가 중심이 되는 기술 기획팀을 구성하고, 실질적인 기획 권한과 피드백 시스템을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자료를 추천할 것인가, 추천 방식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민감한 정보의 필터링 기준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은 모두 도서관의 가치체계와 직결된 결정 사항이다. 이 과정을 외주화하면 공공성의 기준이 흐려질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기술을 수용하되 도서관의 전문성과 가치에 기반하여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 구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향후 디지털 도서관이 단순히 기술 기반 플랫폼이 아니라, 사서의 판단력과 통찰이 반영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4. 기술이 아닌 사람을 위한 AI: 도서관의 미래를 위한 제언
결국 사서 주도형 AI 설계의 핵심은 기술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정보 접근성을 구현하는 데 있다. 인공지능은 도서관의 자동화를 넘어, 새로운 정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그 힘이 잘못 사용될 경우, 정보 편향, 사생활 침해, 접근성 불균형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AI의 설계와 활용에 있어 도서관은 반드시 공공성과 윤리성을 기반으로 한 판단 체계를 갖춰야 하며, 그 중심에는 사서가 있어야 한다. 사서는 이용자의 맥락을 이해하는 사람이며, 도서관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인력이다. 따라서 AI가 인간의 판단을 보완하고, 도서관 서비스를 더욱 정교하게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그 기술의 시작과 끝을 설계하는 주체가 사서여야 한다.
앞으로의 도서관은 AI와 함께 움직일 것이고, 정보의 흐름은 점점 자동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인간적인 판단, 가치 판단, 맥락 이해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사서가 주체가 되어 설계한 AI 시스템은 이용자의 경험을 풍요롭게 만들고, 도서관의 본질적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기술은 목적이 아닌 도구일 뿐이다. 사서가 그 도구를 어떻게 설계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도서관은 더욱 강력한 공공 정보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사서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방향을 설계하고 가치를 담아내는 ‘정보 기술 디자이너’로 거듭나야 할 시대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도서관 이용자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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