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시대의 기록학: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 기록의 정의가 바뀌는 시대: 데이터는 새로운 기억의 원료인가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로 촬영되는 사진, 이메일과 SNS에 쌓이는 메시지, 업무 시스템에서 자동 생성되는 로그 데이터, 그리고 우리가 플랫폼에서 클릭하는 모든 행동까지—이 모든 것이 기록이다. 데이터 시대는 기록의 경계를 무한대로 확장시켰고, 기록학을 “무엇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닌 “어디까지 기록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했다. 과거의 기록이 문서나 문헌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디지털 흔적 전체가 기록의 후보가 된다. 그러나 양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곧 가치의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이터는 무한하지만, 그 안에서 진실을 해석하는 능력, 유의미한 것을 분별해내는 기준은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특히 문제는 디지털 기록의 생명 주기가 매우 짧다는 점이다. 서버 장애나 기술의 변화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고, 특정 플랫폼의 정책 변화에 따라 기록물 전체가 삭제되는 사례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기록은 더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쉽게 사라지며, 역설적으로 “기록의 시대”는 “기억 상실의 시대”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록학은 데이터 시대에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를 단순한 보존이나 저장의 기술을 넘어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록의 본질적 가치는 인간의 선택과 해석, 즉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윤리적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2.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치 판단과 사회적 합의의 문제
데이터 시대에는 기록 후보가 무한하지만, 실제로 보존할 수 있는 기록은 제한적이다. 저장 공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록을 유지·관리하고 향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인력·기술·시간은 모두 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록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 하지만 그 가치 판단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내리는가? 과거 기록학에서는 국가나 기관의 관점에 따라 문서의 중요도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데이터 시대에는 기록의 가치가 훨씬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일상 기록, 시민의 기억, 플랫폼 사용자 데이터, 지역 공동체의 디지털 흔적 등이 모두 역사적 기록 후보로 등장했다.
이 지점에서 기록학은 민주적 관점을 통해 기록의 대상을 재정의해야 한다. 기록은 권력 있는 자의 증언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소수자·지역 공동체·시민 개인의 경험 또한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예를 들어, 팬데믹 기간 동안 개인의 일기, 지역 커뮤니티의 SNS 게시물, 의료기관의 비정형 데이터 등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기록이 되었듯, 데이터 시대의 기록은 기존의 공식 문서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사회의 층위를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디지털 흔적을 보존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기록엔 항상 “선택”이 동반된다. 기록학은 이제 ‘남길 가치가 있는 데이터’를 판별하기 위해 다양한 기준을 고려한다:
- 사회적 의미
- 장기적 활용 가능성
- 커뮤니티의 요구
- 기록 생산 주체의 다양성
- 윤리적 고려(개인정보, 프라이버시)
즉, 기록은 기술이 아닌 사회가 함께 결정하는 공적 행위이다. 남길 것을 정한다는 것은 결국 ‘미래에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도서관·기록관·사서·아카이브 전문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3.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술, 보존, 문맥화의 과제
기록은 저장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되고 활용되는가에 따라 기록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특히 데이터 시대의 기록은 기술적 보존과 문맥의 유지라는 두 축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디지털 자료는 시간이 지나면 형식이 낡아 접근이 어려워지며, 하드웨어·소프트웨어가 바뀔 때마다 데이터가 열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기록학에서는 OAIS(Open Archival Information System) 모델 같은 국제 표준을 기반으로 디지털 보존 전략을 세우고, 형식 변환(Migration), 에뮬레이션(Emulation), 지속적 모니터링 등 다양한 기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술적 보존만으로는 기록이 ‘기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록은 문맥을 잃는 순간 의미를 잃는다. 데이터 시대의 문맥 상실은 더욱 심각하다. 데이터는 매우 세분화되고 구조화되어 있지만, 이것만으로 사회적 배경, 감정, 사건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SNS 게시물은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장면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 왜 작성되었는지 맥락 없이 저장하면 미래 세대는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기록학은 기술 이상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해설과 주석, 큐레이션, 맥락화, 그리고 스토리텔링. 이 과정에서 사서와 기록전문가는 기록을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역사적 서사’로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데이터 시대의 기록은 더 이상 수동적 보존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석과 재구성의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기록학이 정보학·문화학·사회학과 결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록이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인간의 해석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4. 미래 기록학의 방향: 공공성과 데이터 주권의 시대
앞으로의 기록학은 더 강력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더 높은 윤리와 공공성을 요구받는다. 데이터가 모든 영역에 스며든 사회에서는 기록이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기록을 관리하는가, 누가 접근할 수 있는가, 어떤 기록이 삭제되는가에 따라 사회적 서사는 완전히 달라진다.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이 특정 정보를 노출하거나 숨기는 것처럼, 기록의 관리 주체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기록학은 공공기관, 특히 도서관과 기록관이 중심이 되어 데이터 주권의 제도적 기반을 설계해야 한다.
또한 기록학은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한다. 시민 아카이브, 지역 기록 네트워크, 커뮤니티 기반 기록 프로젝트 등은 기록을 더 민주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대안적 방식이다. 기록을 국가나 기관 중심이 아니라 시민의 경험과 목소리로 확장하는 것은 데이터 시대 기록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미래의 기록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 기록은 누구의 기억을 대표하는가?
-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 플랫폼 시대의 기록은 어떻게 공공성을 지킬 것인가?
- 기술과 인간의 해석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기록학은 단순한 보존 기술을 넘어 사회적 정체성, 공동체의 역사, 시민의 권리를 설계하는 학문이 된다. 데이터 시대의 기록학은 결국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도서관과 사서는 그 중심에서 미래의 기억을 설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