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의 감정노동과 심리적 소진 문제
1. 도서관 안의 보이지 않는 감정노동, 사서의 일상 속 얼굴
사서는 종종 ‘조용한 도서관에서 일하는 차분한 직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이미지 속에는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노동이 존재한다. 특히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의 다양한 이용자와 마주하며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정서적 대응, 갈등 조정, 감정 중재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예컨대 이용자의 무례한 언행, 자료 미반납에 따른 고성, 민원 응대, 규정 위반에 대한 설득 과정 등은 사서에게 감정의 절제를 요구하는 반복적 상황이다. 특히 사서가 겪는 감정노동은 백화점 직원이나 콜센터 상담원과 같은 '서비스직'과는 다르면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도서관은 공공성과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사서의 언행은 더욱 조심스럽게 관리되어야 하며, 사적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 많다. 감정을 억제하고 웃음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전문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이 이중의 요구는 사서들의 정서적 피로 누적과 심리적 불균형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특히 이용자와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하는 대민 업무가 지속될수록 ‘내 감정은 투명하게 지워지고, 도서관의 얼굴만 남는다’는 무력감은 점차 깊어진다.
2. 사서의 소진을 부르는 구조적 요인들
사서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소진(burnout)은 감정노동 그 자체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제도적 한계와 조직적 구조에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인력 부족이다. 특히 작은 규모의 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 농어촌 공공도서관에서는 사서 한 명이 대출·반납, 장서 관리, 프로그램 운영, 청소, 민원 응대까지 전부 맡는 경우가 많아 업무 과중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과도한 역할 분산은 사서로 하여금 항상 '바쁘지만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는' 상태에 머물게 한다. 둘째로는 사서의 전문성과 감정노동의 무게에 비해 사회적 인식과 처우가 낮다는 점이다. 사서는 정보 전문가이자 공공 서비스 제공자이지만, 종종 단순한 행정직이나 운영보조인력으로 여겨지는 현실은 자긍심을 약화시키고, 감정노동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셋째는 복잡한 민원과 외부 압력에 대한 심리적 방어 장치의 부재다. 많은 사서들이 이용자와의 갈등 상황에서도 ‘조용히 참고 넘어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정작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고 있음을 말할 공간이 없다. 마지막으로는 감정노동 교육이나 심리 상담 프로그램 등 예방과 회복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결국 사서들은 공공성과 윤리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무언의 책임감 속에서 점차 자기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3. 사서의 마음 건강을 위한 조직 문화와 실천적 접근
사서의 감정노동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스트레스 문제가 아니라, 도서관 조직 전체의 문화적 재설계와 복지 인식의 전환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우선 도서관 내부적으로는 사서 간의 감정 공유와 정서적 지지를 위한 시스템 마련이 중요하다. 정기적인 감정노동 사례 공유 시간, 감정 대응 매뉴얼 개발, 사서 대상 스트레스 인식 설문조사 등은 심리적 고립감을 완화하고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다’는 동료의식을 북돋울 수 있다. 또한 도서관 관리자나 운영 책임자들은 사서의 업무 배분에서 감정노동이 집중되는 시간대나 상황을 파악하고, 업무 강도를 유연하게 조정하거나 보조 인력을 확보하는 등 구조적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 감정노동 대응 교육도 이론 중심이 아닌 실제 상황별 시뮬레이션, 비폭력 대화(NVC), 공감적 응대 훈련 등을 포함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서의 감정노동을 ‘필요하지만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 ‘노동의 핵심’으로 인정하고 조직 내에서 정당한 노동으로서의 위치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부 도서관에서는 외부 심리상담사와 연계한 치유 프로그램, ‘사서 힐링 데이’ 운영, 소규모 감정 회복 모임을 운영하며 사서의 정서 회복을 도모하고 있다. 이런 실천들은 단지 한 사람의 마음을 보듬는 일이 아니라, 도서관 전체의 신뢰와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근본적 장치다.
4. 감정노동을 직업윤리와 연결 짓는 사서 정체성의 재정립
사서의 감정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한 고충 호소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사서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정보 제공자로서의 사서는 중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조절해야 하며, 이용자 중심 서비스라는 가치는 정서적 배려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이것이 감정을 억누르고 희생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면, 결국 사서 자신도, 이용자도 건강한 도서관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오히려 사서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조율하며, 정서적 경계를 세울 수 있어야만 윤리적 서비스가 장기적으로 가능해진다. 따라서 사서의 감정노동은 직무 윤리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나아가 사서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직무 수행의 변수로 인식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거리 두기와 요청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관리자와 이용자 또한 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감정노동은 직업의 일부이지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서가 자신의 감정을 지키며 타인의 정보권리를 보장하는 존재로 설 수 있을 때, 그 도서관은 단지 책을 대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진정한 공공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